고토 신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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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토 신페이는 1857년 일본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정치인으로, 일본 제국 시기 여러 요직을 거치며 식민지 정책과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의사로서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고, 위생 행정에 종사하며 《국가위생원리》를 발표했다. 독일 유학 후 내무성 위생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소마 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수감되기도 했다.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재임하며 대만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초대 만철 총재로서 만주 경영에 힘썼다. 가쓰라·데라우치 내각에서 체신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을 역임했으며, 도쿄 시장으로 재임하며 도시 재건 계획을 추진했다. 말년에는 정치 윤리화 운동을 펼치다 192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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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신페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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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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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고토 신페이 |
출생일 | 1857년 7월 24일 |
출생지 | 육오국胆沢郡 시오가마촌 (현재 이와테현오슈시미즈사와구) |
사망일 | 1929년 4월 13일 |
사망지 | 교토부 |
묘소 | 아오야마 묘지, 도쿄, 일본 |
국적 | 일본 |
직업 | 정치인, 의사 |
신분 | 정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백작 |
배우자 | 고토 가즈코 |
친족 | 쓰루미 유스케 (사위), 시이나 에쓰사부로 (조카) |
학력 | |
출신 학교 | 스가가와 의학교 (현 후쿠시마현립 의과대학)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해당 사항 없음 (정당에 소속된 적 없음) |
기타 직책 | 제7대 도쿄 시장 (1920년 12월 17일 ~ 1923년 4월 27일) 초대 철도원 총재 (1908년 12월 5일 ~ 1911년 8월 30일) 제3대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1898년 3월 2일 ~ 1906년 11월 13일) |
관료 경력 | |
초대 만철 총재 | 1906년 11월 13일 ~ 1908년 7월 14일 |
내각 직책 | |
제18·20대 체신대신 | 1908년 7월 14일 ~ 1911년 8월 30일 (제2차 가쓰라 내각) 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제3차 가쓰라 내각) |
제30·34대 내무대신 | 1916년 10월 9일 ~ 1918년 4월 23일 (데라우치 내각) 1923년 9월 2일 ~ 1924년 1월 7일 (제2차 야마모토 내각) |
제33대 외무대신 | 1918년 4월 23일 ~ 1918년 9월 29일 (데라우치 내각) |
2. 생애
고토 신페이는 1857년 이와테현 무쓰국(현재의 이와테현)에서 센다이 번 영주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이었던 루스 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2] 가문은 사무라이 신분이었지만 부유하지 않았고, 보신 전쟁에서 패배 후 사무라이 신분을 포기하고 농부가 되었다.[2] 1869년 이사와가 메이지 정부 직할 현이 되면서, 고토는 정부 관계자의 눈에 띄어 행정 지원을 하게 되었고, 1871년 야스바 야스카즈의 후원으로 도쿄를 방문했으나 별 성과 없이 1872년 귀향했다.[2]
17세에 후쿠시마현 스카가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후 나고야 아이치 현립 병원에서 의사가 되었고,[2] 1877년 사쓰마 전쟁 당시 정부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25세에 나고야 의과대학 학장이 되었고, 1883년 내무성 위생국에 입사하여 국장이 되었다. 1890년 독일 유학 후, 국가 위생 원리(国家衛生原理)를 출판하고 도쿄 하수도 및 수도 시설 건설에 참여했다.[2] 육군 차관 고다마 겐타로의 추천으로 청일 전쟁 (1895–95)에서 육군 검역소장으로 23만 명 이상의 병사 귀환을 관리했다.[2]
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포르모사와 펑후 제도가 일본에 할양되면서, 고다마 겐타로 타이완 총독의 요청으로 민간 업무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3] 고토는 토지 측량을 명령하고, 윌리엄 키닌몬드 버턴을 채용하여 식수 및 하수 처리 시설을 개발했다.[3] 군사 경찰을 민간 경찰로 대체하고, 정부 관리와 교사의 제복과 칼 착용을 금지했으며, 촌로와 촌장을 행정에 참여시켰다.[3] 타이베이에 공립 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우고, 열대 질병 치료 진료소를 설립했다.[3] 아편 중독 문제 해결을 위해 점진적 금지 정책을 시행하여 중독자 수를 크게 줄였다.[3] 아편 판매 면허를 타이완 의민군 진압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사용하여, 아편 중독 감소와 의민군 활동 약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3]
고토는 타이완은 生物学の原則일본어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고, 臨時台湾旧慣調査会일본어를 창설하여 타이완 주민들의 습관과 존재 이유를 이해하려 했다.[2] 니토베 이나조를 채용하여 임업 및 아열대 농업 장기 계획을 개발하게 했고, 도로 시스템, 우체국 네트워크, 전화 및 전신 서비스, 수력 발전소, 신문, 타이완 은행을 설립하여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자립시켰다.[2]
일본 식민 통치 초기 경찰의 잔혹함은 반란을 초래했으나, 고토는 청나라 보갑제도를 바탕으로 호고 제도를 만들어 지역 사회 통제를 강화했다.[4] 호고 제도는 세금 징수, 아편 흡연 감소, 인구 감시에 활용되었고, 지역 경찰과 통합되어 효과적으로 운영되었다.[4] 경찰서는 원주민 지역에서 "야만인 자녀 교육 기관"을 운영하여 원주민 아이들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키고, 소총을 통제하며, 작은 물물 교환소를 운영했다.[4]
1906년 만주 철도 초대 총재가 되었고,[2] 1908년 제2차 가쓰라 내각에서 통신대신과 철도원 장관으로 일본에 돌아왔다.[2] 1912년 拓殖局総裁일본어 국장이 되었고,[2] 다이쇼 정변 이후 입헌동지회 정당 결성에 기여했다.[2] 1916년 내무대신, 1918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2] 범아시아주의 신봉자로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으며, 시베리아 출병을 지지했다.[2]
1919년 3.1 운동 이후 고토는 시위의 폭력적 진압과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옹호하며, 한국이 미개하고 일본이 문명화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
1920년 도쿄 시장을 역임하고,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 재건에 기여했다.[2] 1924년 쇼코샤 시계 연구소는 첫 회중시계를 생산하여 고토 시장에게 헌정했고, 고토는 이 시계를 "시티즌"이라고 명명했다.
1929년 오카야마 방문 중 뇌출혈로 사망했고,[2] 유품은 이와테현 미즈사와 고토 신페이 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2]
2. 1. 출생과 의사 생활
1857년 7월 24일(안세이 4년 6월 4일) 센다이번의 가문인 루스씨 가신 고토 사네타카(後藤実崇)와 루스씨 번의(藩醫) 다카노씨의 딸 리에(利恵)의 장남으로 무쓰국 이사와군 시오가마 촌(현재 오슈시 미즈사와 구)에서 태어났다.[108] 에도 시대 후기 란가쿠샤인 다카노 조에이는 먼 친척이다. 오늘날 다카노 조에이, 고토 신페이, 사이토 마코토를 "미즈사와 3걸"이라 부르지만, 신페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에도 시대 말기에는 다카노 조에이와의 관계 때문에 "모반인의 자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다.[10]1864년(겐지 원년) 3월, 다케시타 세쓰잔(武下節山)의 가숙에서 한자를 배웠다. 1867년(게이오 3년) 2월 루스 구니야스(留守邦寧)의 시동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번학 입생관(立生館)에 들어가 경사와 시문을 배웠다.[109] 11세에 루스 구니야스의 오쿠코쇼가 되었다.[11]
1869년(메이지 2년) 2월, 루스씨가 삭봉되면서 고토씨도 평민이 되었고,[109] 같은 해 8월 폐번치현으로 미즈사와 성 안에 이사와 현 현청이 설치되자 사이토 마코토, 야마자키 다미노리(山崎為徳)와 함께 현청 급사로 채용되었으며,[110] 9월에는 이사와 현 다이산지 야스바 야스카즈(安場保和)의 학복(學僕)이 되었다. 폐번치현 이후, 단자와 현 대참사였던 야스바 야스카즈에게 인정받아 훗날 해군 대장이 되는 사이토 마코토와 함께 13세에 서생으로 발탁되어 현청에서 근무했다.
1871년(메이지 4년) 도쿄로 상경하여 다이조칸 소사 쇼무라 쇼조(荘村省三)의 학복이 되었다가 다음 해 귀향하여 다케시타의 가숙에서 다시 시문을 배웠다.[109] 15세에 상경하여 도쿄 태정관 소사 소무라 쇼조 아래에서 문지기 겸 잡역을 맡았다.
1873년(메이지 6년) 5월, 아카와 미쓰히로(阿川光裕)의 권유로 후쿠시마현 스카가와로 유학을 떠나 후쿠시마 현 제일양학교에 입학하였고,[109] 다음 해 스카가와 의학교에 입학하였다.[111] 고토는 처음에는 정치가를 지망했지만, 야스바 야스카즈와 아카와 미쓰히로의 권유로 17세에 스가와 의학교에 입학했다.
1876년(메이지 9년) 야스바 야스카즈와 아카와 미쓰히로를 따라 아이치현 병원(현재 나고야 대학 의학부)에서 의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여 오사카 육군 임시 병원과 나고야 진대 병원에서 의사로 활약하였다.
병원 복귀 후 여러 차례 건백서를 제출하였으며, 1879년(메이지 12년) 사립 위생회의 전신인 아이슈샤(愛衆社)를 설립하였고, 1880년(메이지 13년) 5월 병원장 겸 의학교장으로 승진하였다.[109] 이 활약상은 내무성 위생국장 나가요 센사이(長與專齋)의 주목을 끌었다.[111]
병원 관련 사무를 담당했고, 24세에 학교장 겸 병원장이 되었다.
1882년(메이지 15년) 4월 기후현에서 연설 도중 괴한에게 습격을 받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치료하였다.[109] 고토가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진찰했을 때, "각하, 뜻하신 바를 이루셨습니다."라고 말했고, 진찰을 받은 이타가키는 "그를 정치가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81년, 아이치현 지도리가하마에 해수욕장이 개장되었는데, 이는 고토의 지도에 따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는 일본 최초의 의료 목적 해수욕 시설인 사미 해안(오카야마현구라시키시)에 이어 의료로서의 해수욕에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사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선진적인 기관에서 서양 의학을 배우지 못한 채 의사가 된 것에 대해 강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 2. 대만총독부 민정장관 시기
1898년(메이지 31년) 2월, 고다마 겐타로가 제4대 대만 총독으로 취임하자, 같은 해 3월에 고토를 대만총독부 민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109] 고토는 '생물학 원리'에 입각한 통치 기초 확립을 강조하며, 대만에 대한 과학적 조사를 통해 현지 실정에 맞는 정책을 제정하고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치 방침으로 무방침주의를 표방하였다.[113] 1900년(메이지 33년)부터 1903년(메이지 36년)까지 고다마가 총독직과 더불어 육군대신, 내무대신, 문부대신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만의 사무는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고토에게 일임하였다.[114]고토는 대대적인 토지 조사 사업과 대만 사업 공채 발행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 후, 타이베이 도시 건설, 대만은행 창설, 화폐 정리 사업, 대만 종관철도(縱貫鐵道)와 항만 건설, 제당업 정책 확립, 위생 제도와 학제 확립, 아편·장뇌·소금·연초 전매사업 등 각종 사업을 추진하였다.[115] 1905년(메이지 38년)에는 일본 정부 국고 보조 없이 대만의 재정적 독립을 이루었다.[116] 한편으로 항일 세력을 진압하고 치안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만청치시기의 민간 자위 조직인 보갑제도를 회복시켜 경찰 보조기관으로 사용하였고, 장정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 운동을 진압하는 데 이용하였다.[117] 이러한 통치 정책은 대만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여 식민자본주의 산업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118]
고토는 임시 대만 구관 조사회를 발족시키고, 교토 제국대학 교수 오카마츠 산타로를 초빙하여 자신은 동 회의 회장에 취임했다. 또한 오다 만 등을 초빙하여 청나라의 법제도 등을 연구시켰다.
개발과 동시에 인재를 초빙하는 데에도 힘썼다. 미국에서 신토베 이나조를 초빙했을 때, 허약함을 이유로 거절하는 신토베에게 집무실에 침대를 들여놓는 등의 특별 조건을 제시하여 결국 승낙을 받았다. 신토베는 식산국 국장 대리, 임시 대만 당무국장으로서 대만에서 사탕수수와 고구마의 보급과 개량에 큰 성과를 남겼다. 또한 평생의 심복이 된 나카무라 제이코를 만난 것도 대만 총독부 시대였다. 유럽 유학 중에 알게 된 임학자 가와이 시타로를 초빙하여[12][13], 가와이는 아리산의 산림 자원 조사, 나아가 아리산 임업 철도의 개통에 많은 성과를 가져왔다. 위생국 시대에 알게 된 의학자 다카기 도모에다는 대만에서 페스트와 말라리아 박멸을 실현하기 위해 고토가 초빙하여 대만 총독부 의학교 교장 및 설립한 총독부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했다.[14]
당시 대만에서도 아편 흡입이 서민들 사이에서 만연해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고토는 아편을 성급하게 금지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아편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구매를 어렵게 하고 흡입을 면허제로 하여 점차 상습자를 줄여나가는 방법을 채택했다.
2. 3. 초대 만철 총재 시기
1906년 고토 신페이는 남만주 철도(만철)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119] 고토는 '문장적 무비'(文装的武備)를 기치로 내걸고 만철을 단순한 철도 회사가 아닌, 만주 경영의 핵심 기관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먼저 만철 궤도를 광궤로 바꾸고, 다롄 항을 건설하고, 푸순 탄광을 개발했다.[111] 또한, 만철 직영 야마토 호텔을 경영하고, 만철 인접 도시들을 정비하고 근대화했다. 뤼순공과학당(뤼순공과대학)과 남만의학당(만주의과대학) 그리고 다롄 병원을 설립하여 교육과 의료 시설을 확충하고, 만철 조사부의 전신인 동아경제조사국을 설치하여 과학적 조사 활동을 벌였다.[120]

고토는 다롄을 거점으로 만주 경영에 힘썼으며, 나카무라 고레키요, 오카마츠 산타로 등 대만 시대 인재들을 기용하고, 젊고 우수한 인재들을 초빙하여 만철의 인프라 정비, 위생 시설 확충, 도시 건설에 힘썼다. 또한 만철조사부를 발족시켜 조사 사업을 실시했다.
당시 청나라 관료 중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베이양 군벌은 일본의 만주에서의 권익 독점에 반대하며 미국을 끌어들여 만철과 병행하는 노선을 건설하려 했다. 고토는 원세개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이 계획을 좌절시켰지만, 반일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만철과의 연락선 건설 지원, 청나라 사람의 만철 주식 소유 및 중역 취임 등을 승인했다.
또한 러일 전쟁 이후에도 북만주에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회복에도 힘써, 만철의 레일을 러시아에서 수입하거나, 이토 히로부미와 러시아 측 요인 간의 회담을 기획했다. (하지만 이 회담은 이토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119]
고토는 일본, 청나라, 러시아 제국 3국이 협조하여 서로 이익을 얻는 방안을 모색했다.
2. 4. 가쓰라·데라우치 내각 시기
1908년(메이지 41년) 7월, 고토 신페이는 만주철도 총재를 사임하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의 체신대신으로 취임했다. 그는 청일·러일 전쟁 이후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도 체신성 조직 개혁, 우편·전화·전신·해운 등 법 정비, 수력 발전 조사 등을 추진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신설된 철도원(현재 JR)의 초대 총재를 겸직하여 국유 철도 기반을 다지고 궤도를 넓히는 데 힘썼다.[111] 1910년(메이지 43년) 6월에는 신설된 척식국의 부총재를 겸임했다가 다음 해 5월에 사임했다. 1911년(메이지 44년) 8월, 가쓰라 내각이 총사직하자 체신대신과 철도원 총재직에서 물러났다.[109]1912년(메이지 45년) 7월, 가쓰라 다로와 함께 유럽과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급히 귀국했다. 같은 해 12월, 제3차 가쓰라 내각이 수립되자 체신대신으로 다시 임명되어 철도원 총재와 척식국 총재를 겸직했다.[109] 그러나 1913년(다이쇼 2년) 2월, 가쓰라의 비입헌적 행동에 분노한 민중이 헌정 옹호와 벌족 타파를 주장하며 의회를 포위하는 사태(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발생하자 가쓰라 내각은 총사직했고, 고토도 내각에서 물러났다.[121] 같은 해 가쓰라가 신정당을 만들려 하자 고토는 이를 지원했고, 10월에 입헌동지회 결성을 준비하던 중 가쓰라가 사망하자 모임에서 탈퇴했다.
1916년(다이쇼 5년) 10월, 정당을 배제하고 조직된 ‘초연내각’인 데라우치 내각이 수립되자 고토는 내무대신으로 입각하여 철도원 총재를 겸직했다. 내무성 개혁, 경찰관 증원 등을 실시하고, 의회에서 가토 다카아키가 이끄는 헌정회의 공격을 막는 데 앞장섰으며, 철도의 광궤화를 각의에서 결정했다. 1917년(다이쇼 6년) 4월, 제1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한 입헌정우회와 입헌국민당이 여당을 자처하자 정국은 안정되었고, 1918년(다이쇼 7년) 4월에 고토는 외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러시아가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으려 하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이를 막기 위해 러시아로 파병했고, 일본에 시베리아 출병을 강하게 요구했다. 고토는 중국 북경 정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출병 문제를 논의한 끝에 시베리아 출병 촉진 의견서를 제출했다.[111] 일본 정부도 자국에 영향을 미치는 공산주의를 막고 시베리아 진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18년(다이쇼 7년) 8월에 출병을 선언했다.[123] 한편 일본 내에서 쌀값 폭등에 분노한 군중의 폭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쌀 소동), 그 영향으로 데라우치 내각은 같은 해 9월에 총사직했다.[124]
2. 5. 도쿄 시장 시기
1920년 12월, 고토 신페이는 도쿄 시장에 취임하여 관리와 교원의 대규모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도쿄 개조 8억 엔 계획안을 세웠으며, 도쿄시정조사회를 설립하였다.[111] 같은 해 적군 유격대에 의해 일본인 거류민이 살해되는 니콜라예프스키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사할린섬 북부를 점령하였다. 고토는 이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 소련의 회담이 결렬되고, 소련 대표 아돌프 요페(Adolph Joffe)가 쑨원과 회견하자 요페를 일본으로 초청하여 일본과 소련의 국교 회복을 모색하였다.[111]1923년 4월, 고토는 시장직을 사임하였다.[109] 그는 도쿄 시장 재임 중이던 1923년, 국민 외교의 기수로서 소련 외교관 아돌프 요페와 이즈 아타미에서 회담하여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의 계기를 만들었다. 요페는 당시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던 미국 공산당원 가타야마 센의 추천으로 파견되었다. 여명회를 조직한 나이토 민지와 다구치 운조 등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우익 단체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도 중화민국 베이징에 있던 요페에게 사자를 보내 중재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고토를 "붉은 남작"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일본과 러시아 국민의 우호를 외치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러시아주의로 여기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에트 러시아 체제를 연화시키기 위해 일로 관계 정상화를 전망했다.
2. 6. 말년
1924년(다이쇼 13년) 1월, 도라노몬 사건의 여파로 내각이 총사직하면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으며, 같은 해 10월에 사단법인 도쿄 방송국(훗날 일본방송협회)의 총재로 취임하였다.[109]1926년(쇼와 원년) 2월에 뇌졸중 증세를 보였으나 4월부터 정치 윤리화 운동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돌며 연설하였다. 1927년(쇼와 2년) 8월에 뇌졸중이 재발하였지만, 12월에 소련 방문을 강행하여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고위급 인사와 회담을 하고 일러 어업 협약 조인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9년(쇼와 4년) 4월 4일, 강연을 위해 오카야마로 향하던 중 열차 내에서 뇌졸중이 재발하였다. 4월 13일에 교토 부립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도쿄 아오야마 영원에 묻혔다.[111]
미시마 미치하루의 『스카우트 십화』에 따르면, 고토가 쓰러지던 날 미시마에게 남긴 말은 "'''잘 들어라, 돈을 남기고 죽는 자는 하(下)다. 일을 남기고 죽는 자는 중(中)이다. 사람을 남기고 죽는 자는 상(上)이다. 잘 기억해 두어라'''"였다고 한다.
2019년 4월,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린지 호국선사에 있는 데스마스크가 신페이 본인의 것임이 밝혀졌다.[26] 세 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 중 하나로, 신페이가 생전에 친하게 지내던 대만의 실업가 구셴룽이 헌납한 것이다.
(도쿄 아오야마 영원)
3. 상훈
연도 | 수여 내용 |
---|---|
1892년 2월 22일 | 정6위 |
1906년 4월 11일 | 남작 |
1906년 11월 13일 | 훈1등 욱일대수장 |
1906년 11월 30일 | 종3위 |
1911년 7월 20일 | 정3위 |
1922년 9월 7일 | 욱일동화대수장 |
1922년 9월 25일 | 자작 |
1922년 9월 30일 | 종2위 |
1928년 11월 10일 | 백작 |
1929년 4월 13일 | 정2위 |
4. 저작
고토 신페이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5. 가계
에도 시대 말기의 난학자 다카노 조에이가 고토 신페이의 종조부이며, 만주국 관료이자 외무대신을 역임한 정치가 시나 에쓰사부로가 그의 조카이다. 또한 정치가 쓰루미 유스케가 사위이며, 손자로는 사회학자 쓰루미 가즈코,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연출가 사노 세키가 있다.[9][105]
고토 신페이의 차남 헤이하치는 후지사와 키시타와 야스 부부의 양자인 후지사와 헤이하치이다. 야스는 기쿠치 헤이하치로의 사촌이자, 기쿠치 겐지로와 고토 내상 시절의 비서관인 기쿠치 츄자부로[103]의 여동생[104]이다.
고토 신페이의 의붓 손자로는 법학자 우치야마 쇼조,[106] 증손자로는 역사가 쓰루미 타로가 있다.[107]
또한, 고토의 손녀(장남 고토 이치조의 딸)는 아지노모토 창업자 가문인 스즈키 츄지의 여섯째 아들이자 미쓰비시 자동차 판매 사장을 역임한 스즈키 마사오에게 시집갔으며, 스즈키 마사오의 딸(즉, 고토의 증손녀)은 전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타로의 증손자에게 시집갔다(가쓰라의 사위인 나가사키 에이조의 손자).
6. 평가 및 비판
고토 신페이는 다방면에서 활동했지만, 여러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강압적인 식민 통치 옹호: 1919년 3.1 운동 이후, 고토는 시위의 폭력적 진압과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옹호했다. 그는 한국이 미개하며 일본이 문명화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5] 이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억압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발언으로 비판받는다.
- 금권 정치: 고토는 금권 정치의 전형, "황금 만능주의의 화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대만 민정 장관 시절 장뇌 전매 이권과 관련하여 스즈키 상점과의 유착 관계가 문제시되었다.[52]
- 언론 탄압: 내무대신 재임 중 잦은 잡지 발매 금지 처분으로 언론인 오스기 사카에를 곤궁하게 만들었다. 오스기는 고토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고, 고토는 그에게 300엔을 건넸다.
- "이 기회주의": 관동 대지진 때 "이 기회에"라는 말을 퍼뜨려, 하네다 공항이나 승마장 건설 등 지진을 계기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58]
- 반미 친소 성향: 고토는 범아시아주의를 신봉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공격적인 외교 정책과 시베리아 출병을 지지했다.[59] 전간기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반미 친소 정치인으로 여겨졌으며,[60] 그의 반미 좌익 성향은 사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 좌익 활동가 지원: 고토는 친족 중에 저명한 좌익 활동가가 많았으며, 그들을 후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 사노 마나부: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장 사노 마나부는 고토의 사위의 동생으로, 고토의 연줄로 만철 동아경제조사국 촉탁 사원이 되었다. 고토는 사노 마나부의 소련 망명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다.[61]
- 사노 세키: 공산당 계열 극작가 사노 세키는 고토의 맏손자로, 고토는 그의 활동을 지원했다.[65]
- 히라노 요시타로: 히라노 요시타로는 고토의 의붓 조카사위로, 고토의 정전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 쓰루미 가즈코, 쓰루미 슌스케, 쓰루미 요시유키: 고토의 사위 쓰루미 유스케의 자녀와 동생의 아들로, 이들은 반미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등에서 활동했다.
- 수상한 인물들과의 교류: 고토는 대범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그중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우려를 샀다.[98]
고토 신페이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정치가였지만, 그의 정책과 행동은 여러 논란을 야기했으며, 특히 한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
7. 기타
고토는 1920년대 초 일본 스카우트 연맹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철도 대신이었던 그는 전국을 여행하며 일본 전역에 스카우트를 홍보했다. 1956년, 그는 사후에 일본 스카우트 연맹의 최고 영예인 금계상을 받았다.[7]
문화인류학자 아야베 츠네오에 따르면, 고토 신페이는 프리메이슨이었다.[95] 나카타 야스히코는 고토 신페이가 독일 유학 중 1892년 제5회 만국 적십자 회의에 일본 적십자사 위원으로 참석하기 전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고 보고 있다.[96]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프리메이슨리와 관계가 깊은데, 고토 신페이가 "소년단 일본 연맹"(현재의 재단법인 보이스카우트 일본 연맹)의 초대 총재가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97]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니노시마에는 1938년에 니노시마 제1 검역소 창설에 힘쓴 고토 신페이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금속류 회수령을 피하기 위해 3등분되어 방공호에 보관되기도 했지만, 1992년에 니노시마 학원 내로 이전・건립되었다.[99] 2024년에는 해안가로 다시 이전되었으며, 이때 설명판이 새로 설치되었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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